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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History

코로나 때문에 멎어버린 우리들의 일상 지금도 그 날을 떠올리면 변화는 늘 갑자기 온다는 생각이 든다. 코로나가 처음엔 뉴스 속 이야기였고, 설마 군대까지 영향을 줄 거라고는 그때까지는 별로 느끼지 못했다.갑작스러운 귀대와 격리 명령그 날도 여느 때처럼 외박에서 부대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분대장 선임에게 전화가 왔는데, 평소와 달리 목소리가 급했고, 가능한 한 빨리 복귀하라는 말만 간단히 했다. 이유를 물을 겨를도 없었다. 우선 복귀하는 게 먼저였다. 부대에 도착하니 2주간 격리해야 했다. 전염병이 빠르게 퍼지고 있었고, 특히 군대처럼 빽빽한 곳에서는 조심스럽게 대처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을 들었다. 나는 그때 건강했지만, 잠복기라는 걸 생각하면 격리는 피할 수 없었다. 운 좋게 격리 중에 식사는 잘 됐다. 선임들이 DFAC, 즉.. 더보기
카투사의 전반적인 생활 카투사 생활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기억에 남는 것은 생활방식이다.군복을 입고 군인이라는 같은 신분이었지만, 하루를 보내는 방식은 일반적인 육군 생활과는 분명히 달랐다.개인 공간이 있다는 것카투사 숙소는 도미토리 형태였다.침실과 옷장은 개인에게 배정되었고, 화장실과 주방만 공용으로 사용하는 구조였다. 완전한 1인실은 아니었지만, 하루를 마치고 혼자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이 마음에 안정감을 주었다. 문을 닫을 수 있는 방 하나가 주는 안정감은 생각보다 컸다. 육군훈련소처럼 생활관 전체가 하나의 공간으로 묶여 있는 환경과는 달리, 혼자 정리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분리되어 있다는 점이 나의 군 생활을 조금 다르게 만들었다.비교적 일정했던 근무 리듬업무 형태도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편이었다. 심지어.. 더보기
자대 배치, 그리고 교도대의 첫날 이름 하나로 시작된 자대 배치 자대 배치는 철저히 랜덤이었다. 화면에 하나씩 이름과 부대명이 뜨고, 그 결과를 모두가 지켜보는 방식이었다. 나와 같은 방을 쓰게 된 룸메이트가 헌병으로 배치되는 것을 보고, 나와 같은 대대라는 점에서 헌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문제는 부대명이었다. 다른 동기들이 익숙한 숫자 조합의 헌병 부대를 받는 동안, 내 화면에는 낯선 이름 하나가 떠 있었다. USACA-K.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다음 날 선임이 올 때까지 그 이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막연히 특이한 부대라는 생각만 들었고, 괜히 마음이 가라앉았다. 선임은 약간의 웃음과 함께 부대 마크를 보여주며 “이게 뭐 같냐”고 물었다. 카투사 중에서도 희귀한(!) 마크라고 하면서 설명을 덫붙.. 더보기
후반기 카투사 교육, 그리고 시험이라는 관문 모두가 끝났다고 말할 때, 우리는 다시 시작했다논산훈련소에서의 5주간 훈련이 끝났을 때, 같은 분대의 한국 육군 훈련병들은 한 고비를 넘겼다는 안도감과 곧 배정받을 자대배치에 묘한 설렘을 느끼는 듯한 분위기가 흘렀다. 하지만 나와 같이 카투사 훈련병들은, 곧 이어 3주간의 카투사 후반기 교육에 묘한 씁슬함도 느꼈다. 그렇게 같이 고생을 한 육군 전우들을 배웅하고, 우리는 곧바로 평택에 위치한 미군 본대, 캠프 험프리스로 이동해 3주간의 후반기 카투사 교육을 받게 되었다. 이미 한 차례 훈련을 마친 상태였기에 체력적으로 여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후반기 교육은 단순한 적응 과정이 아니라, 자대 배치를 받을 자격이 있는지를 검증하는 단계에 가까웠다. 이 교육을 무사히 마쳐야만, 비로소 카.. 더보기
한국 남자들의 숙명, 군대 이야기 군대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다대학교 2학년 1학기 어느 날,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군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2학년을 마치고 함께 입대해 복학 시기를 맞추자는 의견이 많았다. 어차피 누구에게나 한 번은 지나가야 하는 길이었고, 단순히 소모되는 시간으로 흘러가게 두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이 시간을 나를 성장시킬 수 있는 기회로 만들고 싶었다.그때 처음으로 "카투사(KATUSA)*"라는 선택지를 고민하게 되었다.인생의 2막, 카투사 지원카투사는 인생에 단 한 번만 지원할 수 있는 기회였다. 탈락하면 다시는 지원할 수 없기 때문에, 결정은 조심스럽고 긴장되는 순간의 연속이었다. 카투사는 성적순이 아니라 토익 점수 구간별 추첨으로 뽑힌다. 총 3개 구간(커트라인 780점 이상~만점 990점 사이.. 더보기
기억에 남는 동아리 활동들 교회에서 시작된 음악의 첫걸음나의 음악적 소양은 대부분 교회에서 자라났다. 어릴 적, 찬양팀에서 기타를 치던 형들이 너무 멋있어 보여서 중학생 때부터 기타를 연습하기 시작했다. 그 후로 자연스럽게 보컬 연습도 병행하게 되었고, 성가대 활동도 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목사님으로 계셔서, 아들인 나는 자연스럽게 교회에서 그런 자리에 봉사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모범을 보여야하는 자리에 있었다. 그때의 경험들은, 다행히 나에게 부담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나는 음악을 좋아했고, 어렸을 때부터 바이올린도 하면서 음악적 소양을 키웠기 때문에, 중학교 시절 기타연습도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대학교에 와서도 음악 동아리에 도전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음악은 내게 늘 두려움보다 설렘을 주는 공간이었다.공원과 무.. 더보기
혹독했던 첫 대학생활 포천, 나에게는 북극 같은 곳내가 처음 다닌 대학은 경기도 포천에 있었다. 지리상으론 서울에서 조금 위로 올라가면 있는 도시였지만, 10년 동안 따뜻한 필리핀에서 살다 온 나에게는 마치 북극처럼 느껴지는 곳이었다. 한국의 겨울이 춥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뉴스나 영화에서 보던 이야기일 뿐, 실제로 영하 20도를 넘나드는 겨울을내가 겪게 될 것이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겨울에는 다이소에서 수면양말을 여러 개 사서 2겹씩 껴 신고 다녔다. 내복이라는 것도 어린 시절 기억에서 꺼내와서 사입어보게 되었고, 기숙사 건물도 방 밖은 차가웠다. 손가락이 굳어 키보드가 잘 눌리지 않을 정도였다.도서관의 기억, 라디에이터 하나에 의지하던 밤가장 힘들었던 기억은 아마 2학기 기말고사 무렵일 것이다. 당시 포천의.. 더보기
MK의 한국생활 적응기 MK, 그리고 애매한 정체성나는 MK였다.Missionary Kid, 선교사 자녀. 선교사인 부모님의 사역지에서 자라며 교육을 받은 사람을 그렇게 부른다. 표면적으론 ‘한국인’이었지만, 한국은 내게 외국만큼 낯선 공간이었다. 길거리 간판이 전부 한국어로 되어 있다는 사실부터가 어색했고, 같은 한국어를 쓰는 친구들과도 감정선이 미묘하게 어긋나는 순간들이 있었다. MK로 자라면서 나는 국적이나 민족보다 삶의 방식이 정체성이라는 걸 배웠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그 정체성을 다르게 해석했다.한국인인데 한국에 익숙하지 않다는 건, 이상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기도 했다. 대학교, 문화의 차이를 실감하다대학교에 입학하고, 처음 몇 주간은 그저 정신이 없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동기들과의 대화 속에서 뭔가 근본적인 .. 더보기